아! 아프리카, 그 푸른대륙에서의 100일 **5 이집트 - 룩소르 동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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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정점에서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가이드 이마는 카이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룩소르로 돌아와 직장을 잡기 전까지 아르바이트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라마단이라 땡볕에 물도 한 모금 못 마시면서도 그녀의 입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이집트의 문화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지식은 우리에게 사진 찍는 시간도 아깝다고 노래하는 것만 같았다.

강을 멀리 돌아 동편으로 돌아오며 창밖마다 부대끼는 모래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저 순례循例하듯, 이렇게 지나치며 역사의 낱알들이 하나하나 내 창窓에 고루 박히기를 기대하기는 처음부터 무리였음에도 나의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귀 기울일 수 있을까.






* 동편 (East Bank)

- 카르나크 신전 (Temples of Karnak)

룩소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신전으로 아문-라(Amun-Re) 신을 숭배하던 곳. 피라미드, 스핑크스와 함께 이집트 3대 유물로 꼽힌다. 1895년에 모래 속에서 발견된 이래 수많은 도굴꾼들의 먹잇감이 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전체 규모의 10% 정도밖에 발굴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전으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들이 양쪽으로 길게 도열하고 있었다. 이 참배 길은 원래 룩소르 신전까지 이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몇몇은 이미 머리를 잃었고 또 몇몇은 온전하였으되 그들의 위상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저 자리에 수천 년을 지키고 있기 위해서는 분명 재료의 강함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기원전 고왕국 시대, 주춧돌을 놓은 이래로 1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공사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대열주실 134개에 달하는 거대한 돌기둥들을 비롯하여, 위엄 넘치는 석상들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는 것만 같되, 그 느낌은 파리의 에펠탑과 같은 현대 건축물 앞에 섰을 때와 사뭇 달랐다. 저 사막의 모래바람도 이곳에선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비록 이제 이렇게 관광객들만이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에 멈췄다 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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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오벨리스크

좀 더 높은 것은 핫셉수트 여왕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아버지 투스모시스 1세의 것이다. 다만 높이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룩소르 신전 (Luxor Temple)

이마의 채근으로, 우리는 해가 서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룩소르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내근처에 있는 이 신전은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Ⅲ)에 의하여 건축되었으며 1년에 한 번 축제기간(3주)동안 아문-라 신을 모셨다고 한다. 시내에서 가까웠던 만큼, 시대를 거쳐 간 수많은 파라오들의 자취가 남아있다.





입구에는 람세스 2세와 그의 아내 네페르타리의 좌상, 그리고 한 개의 오벨리스크가 남아있는데, 반대편 함께 축을 이루던 오벨리스크는 지금 파리의 콩코드 광장으로 옮겨져 있다. 나폴레옹의 원정당시 그가 조세핀을 위하여 가져간 것으로, 지리적으로 아랍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주요한 위치에 있던 이집트는 고대왕국이 무너진 후 이렇게 수없이 많은 유물들을 제국 열강들의 손에 넘겨주어야 했었다. 그리고 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구의 반대편 이 나라에 겹쳐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마 이런 역사가 또 교육과는 별개로 우리를, 그리고 이 사람들을, 민족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집트에 기독교 문명(Christianity)이 들어왔을 당시, 그들은 기족의 벽화를 지우고 그 위에 기독교 벽화를 그리려고 시도했었다. 지금에 그 일들은 또 다른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람세스 2세의 석상은 가는 곳마다, 그리고 중요한 자리마다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는데, 그 것은 그가 당시 얼마나 위대하고 권력을 쥔 왕이었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기원전 1279년에서 1212년까지 그의 나이 30세에 파라오에 즉위한 이래로 67년간 그는 수많은 적을 맞아 전쟁을 치러냈으며 영토를 넓히고 또 곳곳에 도시와 신전을 세우며 이집트의 문화적 부흥을 이끌었다.




파라오의 성기부분에 손때가 묻은 것은 우연이 아닐테고 또 그 크기와 비례하여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신전을 다시 나설 때 즈음, 석양은 나일강위로 너울거리며 넘어가고 있었고 날씨는 눈에 띄게 선선해지고 있었다. 총총히 숙소로 돌아가는 관광객들 뒤로 신전에는 조용히, 그러나 차분히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등산화로 넘어든 먼지를 잠시 앉아 털어내며, 난 문득 남겨진 것과 그리고 사라진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의 흔적은 이렇게 유형의 자산을 남겨 놓았지만, 아마 우리가 보고 싶어 했던 것은 다만 이 것뿐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내가 다 미처 알지 못한, 그리고 듣지 못한, 누비안(Nubian) 사람들 뿌리 깊은 시간들이 이곳에 흘렀었고 그들은 분명 북쪽의 수도, 카이로 지방 사람들과 달랐을 테고 에티오피아와 직접 교류한 역사를 보면 지금의 수단과의 국경도 달랐을 것이다.

아직 흐릿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싶고, 또 무엇을 봐야하는지. 사실 이번 여행에서 이집트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으므로, 또한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책하기에는 시간이 늦고 또 해가 많이 기울어있었다.




해가 저문 숙소에서는 푸짐한 저녁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마단 기간을 맞아, 우리는 숙소 주인아저씨와 친구 분들의 저녁식사에 초대되었고 또 기꺼이 응했다. 축제기간이니만큼, 이렇게 함께 저녁을 나누는 모습은 룩소르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해가 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으로, 사람들은 먼저 사탕수수 주스로 빈속을 달래고 식사를 시작했다. 재료가 무엇인지 일일이 알 수 없었지만, 낮에 호텔에서 먹었던 식사보다 분명 맛있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마 난 이때부터 손으로 먹는 음식의 맛을 조금씩 알아갔던 것 같다. 식사와 함께 우리는 이집트의 역사와 또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과의 두 번의 전쟁에서 패한 후, 중동과 미국과의 중계자를 자처하던 이집트는 사실 아랍세계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아왔고 또 실제로 극우 이슬람 세력의 성전(Jihad)에 대통령 사다트(Muhammad Anwar El Sadat)가 1981년 암살되고 폭탄테러가 잇따르는 듯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쟁에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점, 아스완댐과 하이댐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만든 점,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점 등을 들으며 깊은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그들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시샤를 피우는 주인 아저씨


늦은 밤, 봉고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흥겨웠다. 거리의 사람들도, 봉고차안의 우리들도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나의 마음은 한편에서 모래먼지와 함께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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